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M24 채피/실전 (문단 편집) === [[6.25 전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orean_M24.jpg|width=100%]]}}} || || '''6.25 전쟁 당시의 대한민국 국군 소속 M24 채피''' || 1948년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는 미국제 중화기로 무장한 대한민국 국군 6개 사단 10만명의 군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도쿄]]의 [[맥아더]] 장군에 건의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이를 부분적으로 수용한다. [[야포]]를 제외한 중화기로 무장한 5만 명 규모의 [[대한민국 국군]] 창설을 미 합동참모본부에 다시 건의한다. 1948년 3월 10월, 합동참모본부는 M24 채피 전차를 대한민국 국군에게 지급하라는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이 한국의 지형에는 기갑병기가 무용지물이라고 보고하면서[*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능력으론 공여해주었던 [[M3 하프트랙|M2 및 M3 하프트랙]]과 차륜형인 [[M8 그레이하운드]]에 대한 유지보수 상태가 처참했던 해당 보고가 어느 정도 작용했었을 수도 있다. 또한 로버츠 준장은 대한민국 국군의 전투력 향상에 마냥 관심 없는 사람은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취약점인 전투지원 분야에 대한 강화 및 주일미군에서 퇴역시킬 전투기 50여대를 받아내려는 등의 노력을 했었다. 다만 대한민국 몫으로 할양된 원조예산이 부족했던 점과 당시 머릿수 확대에 혈안이었던 대한민국 국군의 반발로 결과적으론 큰 실효를 못 거두었다.] 최종적으로 지원이 취소되었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본격적인 전장 데뷔가 시작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한국전채피.jpg|width=100%]]}}} || || '''낙동강 전선에서 촬영된 미 육군 제24보병사단 소속 M24 채피'''[* 1950년 8월 17일에 촬영된 사진이다.] || 구형 셔먼과 동급이라는 75mm 포를 믿고 북한군의 [[T-34-85]] 중형전차와 정면승부한 결과 예상과 달리 T-34에게 거의 피해를 못주었다. T-34 1대가 전투 중 궤도가 망가지는 등의 사유로 전투불능에 빠지는 동안 M24는 7대가 완파되는 사례가 나타난다. T-34에게 압도적인 교환비로 파괴되어 전차간의 전투에서 부적합병기로 판정되었고 이후로는 보병지원용 내지는 수송부대 공격 등에 쓰였다. 그러나 해당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북한군의 [[대전차 소총]]이나 소형 [[대전차포]]에 취약한 모습을 보였기에 보병을 지원하는 상황에서도 [[M4 셔먼]]이나 [[M26 퍼싱]] 같은 중형전차처럼 전차를 선두로 보내기 어려운 일이 종종 있었다. 물론 초반의 절망적인 교환비는 채피의 성능문제라 보긴 어렵다. 전쟁 초 대한민국 국군과 주일미군의 상태가 하나같이 개판 오분전이라 훈련, 보급, 전략 전술 오류가 심각했으며, 경전차와 중형전차의 운용 차이도 이해하지 못하는 등의 실책을 범했기 때문이다.[* 사실 알았어도 불가피했던 것이 개전 당시 주일미군이 보유한 전차라곤 채피를 제외한 셔먼과 퍼싱은 가동률이 %가 아니라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올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그 얼마 없는 전차들도 현지 설비로 보수한 부속품이 견디지 못해 부산항에 하역한 직후 얼마 안 가서 망가졌다.] 어찌됐든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반도에 본격적인 전차들이 대량으로 투입되자 채피는 후방에서 2선급 임무를 담당하거나 정찰용으로 사용되거나 혹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모집한 [[소년전차병]]의 훈련용 전차로 사용되었다. 휴전 협정 후에는 대한민국 국군이 사용하던 채피 전량이 회수되어 대만에게 넘겨져 사용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19_GMC.jpg|width=100%]]}}} || || '''부산 교두보 전투 당시의 미 육군 소속 M19 더스터''' || 자주대공포 파생형인 M19 더스터도 1950년 8월 부산 교두보 전투부터 참전하여 장진호 전투 당시에도 중공군들을 상대로 대활약했다고 한다. 어찌나 대활약하였는지 중공군은 더스터만 보면 이를 갈며 '''"이 악마같은 전차를 잡는 병사에게는 포상금을 주겠다!"'''라고 천명하기까지 했고, 타 전차 진지는 적들이 몰려오지 않는데 반하여 더스터가 맡았던 진지는 중공군들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어 전차병들이 권총까지 들며 백병전을 치룬 일화까지 존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